Ludwig Mies Van Der Rohe (1886~1969)

1886년 아헨에서 출생.
1969년 시카고에서 작고.
그는 건축에 관련된 형태의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의 건축이 보여주는 고도의 훌륭한 장인 기질과 건축능력은 석공이자 돌 조각가인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아헨에서 치장벽토(stucco)장식 디자이너로서의 작법을 배웠다. 1905년 베를린으로 가서, 나무로 된 구조물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건축가로 잠깐 활동했다. 목재에 대해 좀 더 배우고자, 당대의 지도자적 가구 디자이너인 B. 파울 밑에서 2년동안 도제 생활을 했다.
 
1908년 그 당시 독일 건축사들 중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던 피터 베렌스와 합류했다. 베렌스와 함께 한 3년간은 그에게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베렌스의 작품 경력은 곧 미스의 작품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예견하는 것이었다. AEG회사를 디자인한 베렌스는 독일 전기 합동 기업의 건물들뿐만 아니라 이밖에 수많은 건물을 선보였다. 그는 근대 산업사회에 적합한 디자이너로서의 건축가에 대한 생각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러나 베렌스의 공장 생산은 자신의 업적에 그칠 뿐이었다. 그 역시 K.F 싱켈의 신고전주의 자신의 건축에 적용시켰고, 특히 기념비적인 성행의 작업에는 더욱 심하였다. 베렌스의 몇 몇 공장들의 단순화된 박공부분과 대리석 각주에 싱켈적인 신고전주의가 나타나곤 했다. 신 고전적인 수단의 엄격성과 형태의 순수성, 비례의 완벽성, 세부 장신의 우아함, 표현의 장중함을 창조사는 것이 미스의 주된 목적이었다. 시작부터 그는 베렌스의 작품이 갖는 산업적 성행보다는 신 고전적 성향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 이유로 베렌스의 기념비적인 건물 중의 하나인 성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독일 대사관(1911~12)의 건설 감독관으로 미스가 함께 했던 일이 미스로 하여금 그러한 성향을 뛰게 하지 않았나 여겨진다. 1911년 베렌스를 떠나 베렌스의 작품과 유사한 성향을 띄게 하지 않았나 여겨진다. 1911년 베렌스를 떠나 베렌스의 작품과 유사한 신 싱켈적인 스타일의 주택들을 디자인했다. 이 당시 미스의 작품 중 주목할만한 것-그의 스승이 보여주었던 신고전주의를 능가하는-으로 H. 크뢸러를 위한 돌출 형태의 주택과 회랑(1912)을 들 수 있다. 미스는 크뢸러의 의뢰에 따라 네덜란드로 건너갔다. 그 곳에서 베렌스에 버금가는 네덜란드 건축가인 베를라헤의 작품과 철학을 접하게 되었다. 베렌스가 형태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고 한다면, 베를라헤는 고전적이기보다는 오히려 고딕적인-재료와 구조에 관해- 정직한 표현에 가까운 19세기 윤리적 이론으로부터 자신의 건축철학을 유추해 낸 사람이었다. 달리 말하여 베렌스는 형태를 강조했고, 베를라헤는 구조와 재료를 강조한 것이다. 새로운 건축을 위한 이 두 성향의 통합이 미스의 건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미스의 낭만적인 신고전주의는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근대 건축에서의 그의 경력은 1919년에서 1924년 사이에 발표된 놀라울 정도의 다양성과 독창성이 깃든 일련의 계획안들을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계획안들은 전후 베를린의 자유적 분위기-독일의 표현주의와 네덜란드의 데 스틸, 러시아의 구성주의와 지상주의 등의 갑작스러운 분출에 따른-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혼란속에서 그는 디자이너이자 선전가로 활동했다. 또한 근대 미술에 이바지한 'G'(Gestaltung의 약자, 조형력)란 이름의 잡지 발기인 중 한 명이었다. 11월 그룹에도 합류하였다. 11월 그룹은 공화주의 혁명이 있었던 달(11월)을 기념하여 1918년에 결성된 조직으로서, 근대 운동을 널리 알린 그룹이다. 미스는 1921~25년까지 이 그룹의 건축분과를 맡아 운영했다. 그의 초기 근대적 계획안이 처음 발표된 곳은 11월 그룹의 연례, 전시회를 통해서였다. 삼각형 형태들(1910)과 자유로운 곡선 형태들(1920~21)로 된 두가지 마천루 계획안에서 그는 마면 형상의 유리가 갖는 반사적인 성질을 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후자의 마천루(자유로운 곡선 형태로 된)는 건물 위에 떨어지는 빛의 유희를 극대화 시키는 형상으로 결정되어졌다. 보강 콘크리트 사무소 빌딩 계획안(1922)이 이보다 더 예언자적인 작품이었다. 캔틸레버로 된 슬래브는 금속의 세로 창살들로 이루어진 줄무늬 형태의 창을 연속적으로 연결시켜 주는 난간에서 끝나고 있다. 나중에 가서야 그 가치를 인정받아 알려지기 시작한 계획안으로, 근대적 건축의 기본 모티브 중의 하나인 가늘고 긴 창문 형태를 처음으로 사용한 작품에 해당된다. 미스의 작품 경력에 있어서 이 단계의 완결작은 두개의 주택 계획안이다.
 
1923년에 디자인된 첫번째 계획안은 벽돌로 이루어진 시골 주택으로, 데 스틸의 원리를 따르고 있다. 슬래브에 사용된 벽돌 패널은 T자형과 L자형 두가지인데, 이 패널은 연결되어 있으며, 공간상의 비대칭적 균형을 이루면서 배열되어 공간적 연속성을 조절하고 있다. 체계적인 디자인임에도 불구하고, 데 스틸의 구성 원리를 적용한 첫 건축 작품으로 인정받는 순수한 형태로 표현되었다. 종래의 데 스틸적 요소와 입체파 요소의 혼합된 형태와는 다른 것이었다. 두번째 계획안은 콘크리트 구조물로 되어 있다. 다층의 테라스 형태로 되어 있는 대지 주변에 마치 바람개비 같은 구성을 한 확산형 구조물이다. 주택의 수평성과 더불어 주요 계획 요소들에 맞추어 만들어진 불규칙적인 매스의 결정은 당시의 국제주의 양식을 지배하던 공간을 각재로 밀집되게 둘러싸는 방법과 반대되는 것이었다.
 
1920년대 후반에 미스의 근대적 스타일을 보여주는 몇 작품이 선보였다. 특히 주목할 만한 작품은 베를린에 있는 칼 리브크네트 로사 룩셈부르크 기념물(1926, 후에 나치에 의해 파괴)이다. 수평으로 깎인 형태 구성과 상자같이 앞으로 나오고 들어가는 형태 요소들로 이루어진 벽돌벽이 특징적이고, 20세기에 세워진 몇 되지 않는 중요한 기념물 중 하나였다. 두개의 벽돌 주택-구벤에 있는 볼프 주택(1926)과 그레펠트에 있는 헤르망 랑게 주택(1928)-은 전후에 보여주었던 그의 신 싱켈주의적 경향에서 얼마나 멀어졌는가와, 초기에 그가 가졌던 신 고전주의적 성행이 어느 정도로 계속되어지는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두 작품은 국제주의 양식과는 부관한 고착성과 입체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볼프 주택은 벽돌벽들의 정밀한 확장이 주는 테라스식의 추상적인 벽돌 배치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당시, 그의 작품을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두 작품은 다음과 같다.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바이센 호프 주거 단지 전시회(1927)가 그 한 예이다. 여기에 유럽 건축계를 주도하던 대부분의 건축가들이 모두 참여하여 각기 다양한 유형의 주거 단지를 대규모의 옥외 전시장에 출품하였다. 독일 공작 연맹이 후원자로 나섰고, 그 진행의 총 책임자는 미스가 맡았다. 이 옥외 전시회에는 당대의 다양한 구조물들과, 단일 세대빌라에서 미스의 뛰어난 아파트 구조물에 이르기까지 실제로 구체화된 21개의 영구적인 건물들이 선보였다. 양적으로 많은 훌륭한 건물들 중에서, 특히 근대 건축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은 바르셀로나에 있었던 국제 전시회(1928~29)에 출품한 미스의 독일관을 들 수 있다. 1923년 발표한 시골 주택에서 볼 수 있었던 데 스틸적 실험이 여기서도 계속되었지만 요소들의 단순화와 초기 디자인의 복잡함을 전체적인 안목으로 다룬 기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바르셀로나관 이후, 유럽에서의 작품 활동 기간 중 가장 중요한 주책을 디자인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브루노에 있는 콘크리트 외장으로 된 투겐하트 주택(1930)이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 완만한 경사 위에 지어진 이 주택은 후면이 2층, 전면(도로에 인접된)이 1층으로 되어 있다. 크롬 도금된 기둥과 자유롭게 서 있는 패널(마카사산 흑단으로 칠해진 반원형의 패널)이 특징인 상대적으로 낮은 곳에 위치하는 거실의 연속적 공간 처리는 바르셀로나관(독일관)을 연관시켜 준다. 여기에 미스가 디자인한 가구가 더해져 더욱 풍부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천장을 받치지 않는 벽으로된 통로의 모든 세부 장식은 평범한 디자인으로 되어 있다. 투겐하트 주택은 유럽에 남긴 마지막 작품이다. 1930년대 초 중반기의 계획안들 중 벽으로 둘러싸여진 안뜰을 가지고 있는 주택 계획안이 가장 의미 있는 것이었다. 비록 둘러싸여진 벽돌벽이 먼 속에서 볼 때 개방되어 있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이러한 주택들의 대부분은 단형 골격으로 전체적인 경계가 이루어져 있다. 한 예로, 다양한 크기의 테라스 주택들은 벽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전체 형태는 단일 직선 형태로 되어 있다. 내부의 경우, 미스식의 공간적 연속성-여기 저기에 패널이 설치되어 단일 공간에 변화를 주는 것-을 주로 하고 있다.
 
그로피우스의 권유에 따라, 1930년 바우하우스 교장이었던 H.마이어의 뒤를 계승했다. 그러나, 1932년 극우익파의 압력을 받아 학교를 데사우에서 베를린으로 옮겨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베를린으로 옮긴 후 짧은 기간동안 사설 학교로서 존립하다가 나치 정부에 의하여 1933년 문을 닫게 되었다. 호전적인 정치적 환경을 독일에서의 작품활동을 거의 불가능하게 하였다. 그는 1937년 여름 미국으로 건너가 거주하였고, 1944년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1938년 시카고에 있는 IIT공대(당시의 이름은 아르모르 대학)로부터 초청되어 학생을 지도했다. 그의 미국에서의 첫번째 작품은 IIT공대의 캠퍼스 계획과 건물들(1940년대부터 시작)이며, 이 작품은 미국에서의 작품 활동의 중심 주제가 되었다. IIT공대 캠퍼스 이후, 일리노이 주 폭스 리버에 있는 유리와 금속 재료로 된 파른스워드 주택(1946~50)을 발표했다. 지반위에 떠 있는 듯한 3개의 슬래브, 테라스 슬래브, 바닥 지붕 슬래브는 모두가 그 형의 보의 지지하에 설치되어 있다. 마치 자기력에 의해 뼈대가 서 있는 것 같은 슬래브 측면의 지지물이 확산되어 가는 슬래브들의 부유적인 성직을 더욱 고양시키고 있다. 상술한 3개의 슬래브처럼 테라스 사이와 단형 유리 박스같은 거실로 통하는 테라스와 현관 출입구 사이에 놓여 있는 슬래브들 역시 마찬가지 효과를 내고 있다. 독특하면서도 우아한 이러한 뼈대의 정교함은 표출된 비대칭성이 내재된 내칭성과 대립되는 구성방식으로 되어 있을 때 생겨나는 성교함에서처럼 때때로 간과되기 쉽다.
파른스워드 주책-일종의 개방된 파빌리온-의 기본 개념은 IIT공대에 있는 건축 및 디자인 학과를 위한 크라운 홀(1952~56)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떠있는 듯한 계단들이 테라스에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파른스워드 주택의 경우처럼 바닥슬래브를 지면에서 몇 피트 정도 들어올린 것 같은 형태로 되어 있다. 하지만 외양에도 불구하고 크라운 홀의 바닥 슬래브 밑이 완전히 개방되어 있다면, 크라운 홀은 판유리로 끼워져 지하층과 연결되어 있는 형태이다. 이런 식의 공간의 개방성은 지지물 위에 매달려 있는 듯한(오히려 부착되어 있는 듯한)2개의 슬래브에 의해 더욱 고양되어 있다.
 
미국에 지어진 그의 모든 작품들의 공간을 볼 때, 바르셀로나관 이후 유럽의 작품에서 보여준 정교하게 모듈화된 공간에 미치게 못하고 있으며, 크라운 홀의 구심적인 박스형 공간에 머물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1953년 시카고에서 좀 더 규모가 커진 파빌리온인 컨벤션 홀 계획안을 내놓았다. 지붕 슬래브는 한 변이 9.1m인 입체 모듈 위에 엮어진 트러스들로 구성된 3차원 구조물로 의도되었다. 미스는 5만여명의 수용인원이 가능한 기둥없는 내부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스팬이 219.5m에 이르는 슬래브-약 두개의 도시 블록에 해당하는 길이-를 만든 것이다. 3차원적인 천장 트러스의 외곽부분으로부터 확장되어진 대각선 버팀대는 외벽을 2차원적인 트러스로 만들어 버렸다. 이 버팀대는 하부의 보강 콘크리트 기둥(약 36.6m)위에 직접 맞닿을 정도로 건물의 전면을 가로지르고 있는 형태로 되어 있다. 파빌리온식 건물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서베를린에 있는 뉴 내셔널 화랑(1962~68)이다. 쿠바의 산티아고에 바카르디 상사 본관 건물을 디자인하였는데, 이 건물은 십자형 단부로 된 8개의 지지물 위에 井間형의 천장이 놓여져 있으며. 각 코너 부분의 지지물은 뒤로 후퇴되어 있는 형태이다. 깊숙이 뒤로 밀려난 유리벽은 몇개의 움직일 수 있는 무대용 벽들에 의해서만 분할되어지는 전시공간을 둘러싸고 있다. 서비스 전시공간은 기초층(pedestal storey)에 꾸며져 있고, 이 앞에는 일종의 조각 정원이 펼쳐져 있다.
기본적인 파빌리온이 일련의 건물들이 중첩 적용됨에 따라 마천루의 골격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뉴욕에 있는 레이크 쇼어 드라이브 아파트(1950~51)와 시그램 빌딩(1954~58, P.존슨과의 공동 작품)은 파에스퉁에 있는 그리스의 포세이돈 사원과 아테네에 있는 파르테논이 같은 건물이자 다른 건물인 것처럼, 같은 건물이면서도 각각 다른 경험을 하게 해주는 작품에 해당한다. 포세이돈 사원같은 레이크 쇼어 드라이브의 수수함이 파르테논같은 시그램 빌딩의 세련됨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레이크 쇼어 드라이브 아파트의 경우, 수직적인 블록들은 협소한 공간 틈새를 서로 가로지르면서 직각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 복합 건물은 전면과 후면의 구분이 되지 않는다. 한 블록의 좁은 면은 다른 블록의 넓은 면과 맞서고 있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서로의 위치가 뒤바뀌는 변화를 즉각 느낄 수 있다.
 
벽돌로부터 돌출된 I형보가 창문 위에서 끝나는 형상은 비스듬하게 기운 형태를 연출하며, 그렇지 못한 형사(창문가지 보가 나오지 않는 부분)은 제대로 놓여진 형태를 연출하고 있다. 이 두 부분의 형상이 서로 엇갈리면서 보이기 때문에 시각적인 변화를 느낄 수 있다.한편, 시그램 빌딩은 직각적으로 불균형을 이루는 정적인 요소의 역설적 표현이 돋보이는 레이크 쇼어와 좋은 대로를 이룬다. 동으로 된 이 빌딩은 출입구 광장의 완전히 빈 공간을 전면에 둔 짙은 검은색의 벼랑같은 모습이다. 광장의 축은 엘리베이터 통로의 탑문(pylon)을 뒤로 하고 서 있는 2층 높이의 각재로 된 출입구의 형태적인 외관에서 절정을 이룬다. 레이크 쇼어 드라이브 아파트의 격자형 창과는 달리, 수평적인 힘이 수직적인 힘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듯하며, 이러한 긴장감은 단정적으로 의도된 듯한 수직성의 강조와 상쇄되고 있다. 즉, 첫번째 요소(수평적인)의 지각적인 긴장감이 반대 요소에 의해 와해된 것이다. 미스가 '그 자체로서 최종적인 것'이라고 여긴 벽돌과 I형 보로부터의 건축을 유도해 낸 것처럼, 몇몇 다른 목적에 적합한 요소적인 건설 유형을 발전시켰다. 그의 연구 방법이 좁은 범위에 한정되어 있지만, 바로 이 점이 그가 추구한 예술의 순수화와 열정적인 통합화를 가능하게 한 것이었다. 그의 위대한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적을수록 더 낫다(Less id more)'라는 개념은 한 이념의 역설적 실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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