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onio Gaudi (1852~1926)

1852년 카탈로니아의 레우스에서 출생.
1926년 바르셀로나에서 작고.
혹시 가우디라는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아마도 어느 광고에 나오는 이름이라고 생각하고 계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가우디는 원래 스페인이 나은 유명한 건축가입니다. 그는 포스트 모더니즘 건축의 선두주자였죠. 그의 작품은 누가 봐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특색이 있습니다. 직선보다는 곡선을 주로 사용하여 자연과 건축물이 하나가 되게 하는 독특한 스타일을 발전시켰습니다. 바르셀로나에 가 보면 그의 작품은 눈에 쉽게 띄고 그 주변에는 아직까지도 많은 관광객들이 줄을 서고 있죠. 그의 설계 도면을 보면 보통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것과 많이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의 미술 스케치같은 형태로 이루어져 있죠. 그런 도면을 기본으로 그가 세상을 떠난 지 70년이 넘은 지금도 그의 작품이 건설되고 있습니다. 바로 바르셀로나에 위치하고 있는 '성 가족 성당'이죠. 짓기 시작한지 100년이 넘은 지금도 아직 완성을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성당의 모습은 1994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당시 TV를 통해서 보셨던 분들도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1995년 제가 바르셀로나를 방문했을 때 총 12개의 탑중에서 8개가 완성이 되어 있었죠. 과연 이 작품이 완성되는 것을 볼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정말 의문입니다. 그 외에도 구엘공원, 카사밀라 등 유명한 그의 작품들은 바르셀로나에 많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다음의 사진들은 제가 바르셀로나에 여행했을때 찍었던 가우디의 작품들입니다.

구엘공원 (Park Guell, 1900 ~ 1914)

 

 

  
카사 배트로 (Casa Batllo, 1904 ~ 1906)

 
카사 밀라 (Casa Mila, 1905 ~ 1910)

 
성가족 성당 (Sagrada Familia, 1883 ~ )


 
구리 세공업을 가업으로 하는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17세때 바르셀로나에 있는 건축 연구소에서 수학하기 시작하여 1878년에 졸업했다. 학창시절의 그는 정규적인 교육 과정에 대해 거의 매력을 느끼기 못했으며 L.아리 바르바의 철학 강의와 P.빌라 아이 폰타날의 미학 강의를 열심히 듣는 학생이었다. 밀라 아이 폰타날은 낭만적 시기동안 로마에서 젊은 시적을 보냈으며, 유럽의 여느 곳처럼 카탈로니아 역시 일종의 낭만적 운동이 있었다. 이러한 운동은 카탈란이란 지방의 언어의 시는 물론 이 지역의 중세 역사와 건축에 관계된 것이었다. 19세기 말을 향해 나아가던 이 운동으로부터 발전된 스페인식 근대주의는 가우디의 상상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그로 하여금 수공예 기술에 대한 존경심과 중세 예술의 정직성을 깨우치게 해 주었고, 비올레 르 뒤크 중세 건축 개념으로부터 기계론적 논리를 얻게 해 주었고, 구조는 물론 세부 장식을 위한 영감의 한 근원으로서 자연을 생각하도록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러한 과정속에 수공예 운동에 관해 스스로 관심을 갖게 되었고, 구엘이란 직물 제조업자와 만나게 되어 그와 후원자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
 
1878년 졸업 직후 바르셀로나에 있는 카사 비센트를 디자인하였다. 이 작품은 계단 모양의 블럭과 돌, 벽돌의 변화를 이루는 건물이다. 이 건물의 건설이 복고주의가 만연할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잘 알려진 어떠한 양식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 그 가치를 높여주고 있다. 실내의 중요 형상은 간접 조명의 조절을 통하여 건축의 각부분들을 마치 모자이크나 색채의 장식을 한 듯하게 만들었다.
 
가우디의 예술적 발전에 있어서의 정점은 바르셀로나의 구엘주택(1885~9)을 들 수 있다. 이 건물에서의 구조적 실험 - 특히, 포물선 아치를 사용했다는 점 - 은 그의 개인적인 양식을 낳게 한 계기가 되었고, 역사주의로부터의 완전한 자유를 얻게 해 준 결정적인 동인이 되었다.
 
1883년 그는 요청에 의해 바르셀로나에 있는 성가족 교회를 디자인하게 되었다. 거대한 규모의 이 건물은 모든 건설이 문제가 그에게 일임되었지만, 오늘날까지도 미완성인 상태로 남아있다. 빌라에 의해 디자인된 신고딕 양식이 이 건물에 이미 도입되었단 상태였다. 가우디는 이러한 양식을 거부하여 장식 솨시리나 세부 장식을 할 때 자연으로부터 많은 것을 유추하기는 했지만, 그가 처음 만든 apse 부분의 선은 고딕적 향수를 많이 느끼게 해 준다. 이 건물의 동쪽 익부(trancept)에 있는 예수 탄생을 기념하는 파사드를 만들때, 방형의 기초 위에 서로 물려 있는 4개의 탑들 사이를 3개의 개방문(open portal)으로 처리하고 전체 파사드는 비스듬하게 놓이게 하였다. 이 탑의 높이는 107m에 이르며, 그 정점은 얇고 곡선을 이루는 왕관같은 원형의 형태로 되어 있고, 모자이트로 닾여 있는 표층을 가로 지르는 일종의 유희의 결과물처럼 보인다. 대부분을 가우디 혼자서 만든 복합적이고도 생동감 넘치는 이러한 세계는 무한히 다양한 식물과 동물, 군중들을 박공 아래에 있는 커다란 오목한 면을 통해 잘 함축되고 있다.
 
이 후, 바르셀로나의 파세오 드 그라시아에 있는 '카사 배트로(1905~7)'에서는 자연적 유기적 형태들이 단순히 건물 위에 입혀진 일종의 장식으로 취급되는 것이 아니라, 뼈같은 형상의 기둥들처럼 근본적인 구조 요소로 구성되어간 것이다. 물결치는 파사드는 파도가 한번 치고 지나간 듯한 다색 모자이크로 덮여져 있고, 비늘같은 지붕은 일종의 아르마딜로(동물)의 등처럼 보인다. 이런한 효과의 형태는 가우디 자신의 초기 작품 성향인 조각적 조형성과 이후의 독자적인 구조적 형태 사이에서 일어난 편형물이다. 이런 구조적 조형성은 바르셀로나 근교의 산타 콜로마드 세르벨로에 있는 '콜로니아 구엘 교회(1898~1914)' 디자인 시스템 중 가장 주된 것이다. 건물의 구조적 리브를 재현하는 근을 모델로 하여 계획된 작품으로. 각 부재가 전달해야 할 하중에 비례하여 리브들이 매달려 있다. 이러한 리브들에 의해 나타나는 선들로부터 생긴 현수선은 건물의 기둥 형상이 반전되어 마치 메달린 것처럼 보인다. 모든 트러스트들이 적당히 기울어진 대각(pillar)과 결합되어 있게 때문에, 어떠한 방법은 후에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회중석을 디자인할 때 다시 이용되었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구엘공원(1900~14)'을 디자인할 때, 벽과 다리를 함께 지지할 수 있는 기울어진 형태의 지지물을 체계적으로 이용했다. 이 공원의 특이점은 추상적인 구성을 강렬하게 표현하는 데 좋은 앙상블을 이루는 세라믹과 유리 모자이크를 풍부하게 사용했다는 것이다.
 
'카사 밀라(1905~10)'는 아마 그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작품일 것이다. 조형적으로 볼 때, 눈썹과 입술에 비교될 수 있는 물결치는 듯한 수평 외곽선의 리듬을 가진 유기적 형상으로, 하나의 커다란 돌 구조물처럼 구성되어있다. 그의 작품과 초현실주의와의 유사점은 바로 여기서 잘 나타나고 있다. 구조적인 면에서 그의 걸작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학교(1909)'이다. 이 건물은 피막형태의 얇은 벽돌 막으로 지붕과 벽체가 이루어져 있다.
 
후기에 접어들면서, 직선은 인간에게 귀속되는 선이며, 곡선은 신에 귀속되는 선이라고 단언하고 나섰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 비록 그의 디자인이 결코 순수한 기하학적 성격을 띄지는 않았지만 - 쌍곡선과 포물선을 바탕으로 한 일종의 우주적인 뜻이 함축된 시스템을 개발했다. 이들 형태들은 우리가 주변에서 익숙하게 대하는 생명력 있는 형상들이었다. 뼈, 근육, 날개, 꽃입 등은 물론, 심지어 동굴, 별, 구름 등의 형상들이었다.
 
개인주의적 성향이 점점 가속됨에 따라, 가우디의 건축은 교육 기관 등에서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고, 20세기 초반의 근대주의에 밀착되어, 그 평가 역시 오랜동안 뒤로 미루어졌다. 가우디에 대한 재평가는 니콜라스 펩스너의 다음과 같은 두가지 비평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1949년의 글에서, 가우디의 성가족 성당은 '영원한 남부 바로크 양식의 시대 착오적인 예로서 평가될 수 있다.' 1957년의 글에서 '그는 아르누보에 의해 탄생된 유일한 천재였다.' 라고 결론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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