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처음 이 영화의 제목을 접했을 때는 그 흔하디 흔한 공주병 걸린 여자의 로맨틱 코미디이겠거니 했었다. ^^? 하지만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고 전혀 분위기가 다른 범죄 스릴러 영화의 시놉시스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나라에서 범죄 스릴러 영화라... 거기다 엄정화가 주연이라구?

엄.정.화.
사실 배우로서 그녀만큼 과소평가 받았던 인물도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개인적으론 좋아하는 가수이자 배우이다. ^^;;) 요즘에야 가수와 연기자 활동을 병행하는 연예인들이 많아졌지만 엄정화가 '눈동자'라는 곡을 부르며 TV드라마에서도 얼굴을 디민 1993년 당시만 해도 가수 겸 연기자 연예인은 그리 흔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후 엄정화의 연예 활동은 연기자보다는 가수쪽에 치우지는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사실 그녀의 실질적인 데뷰는 1992년 영화 '바람부는 날에는 압구정에 가야 한다'이다. 물론 그 전에 MBC합창단 활동을 하긴 했지만) 그래서 많은 대중들은 그녀를 배우보다는 가수로서 더욱 기억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최근 몇년간 그녀의 활동은 가수보다는 배우로서 치중하고 있는 듯 하며 이제 대중들도 가수 엄정화보다는 배우 엄정화를 더 선호하는 듯 하다. 그녀를 배우로서 강하게 각인 시킨 작품은 아마도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와 TV 드라마 '아내'였을 것이다. 이 두작품을 통해서 엄정화는 기존의 섹시 가수 이미지를 벗고 당당한 커리어 우먼과 눈물 마를 날이 없는 비련의 여주인공을 넘나들며 배우로서의 영역을 넓혀 갔다. 이런 그녀의 프로필에 '오로라 공주'는 어쩌면 커다란 전환점이 될 수 있을만한 작품이 될 것 같다.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엄정화라는 배우가 중심이 된 영화이다. 사실 영화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과연 그녀가 원톱으로서 한 영화를 이끌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녀는 보기좋게 이런 걱정을 잊게 해 주고 있다.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정순정이라는 캐릭터를 통하여 때로는 신비스럽게 때로는 섬뜩하게 때로는 애처롭게 그녀는 관객들의 감정을 이끌어가고 있다. 방은진 감독의 연출 또한 그녀의 다중인격적인 캐릭터를 기괴하고 복잡하지 보여주기보다는 단순하고 절제된 모습으로 표현해 주고 있다. 그래서 관객들은 영화를 보며 왜 그녀가 그렇게 잔인하게 여러명을 죽일 수 밖에 없었는지 공감하게 만들면서 그녀를 연쇄살인범으로 보기 보다는 억울하게 죽어간 아이의 엄마로 각인시킨다. 이런 요소는 아마도 이 영화의 가장 큰 요소가 아닐까 생각된다. 스릴러라는 장르를 택했지만 결국은 드라마적인 성격이 부각되어 헐리우드 범죄 스릴러에 비해 국내의 감성에 좀 더 접근할 수 있을 듯 하다. 관객들은 첫장면에서는 잔인한 살인장면에 깜짝 놀라기도 하지만 결말에 가서는 자신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고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방은진 감독은 배우로서의 경력을 뒤로 하고 처음으로 장편 영화를 연출했다. 잘 짜여진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게 스토리를 진행지키며 관객들을 지루하지 않게 감정 조절을 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일반적인 범죄 스릴러 영화와는 달리 이 영화는 처음부터 범인이 누구인지 관객들에게 알리고 시작한다. 그래서 관객들이 과연 범인이 누군지를 궁금해하고 추리해 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살인의 이유를 의문시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서 감독은 정순정을 통하여 현실에 대한 차가운 시선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 베이시스 출신의 정재형의 영화 음악도 이런 감독의 의도에 맞게 영상을 잘 받쳐주고 있다.

한가지 아쉬웠던 점은 형사들의 수사에 관한 연출의 디테일이었다. 단적인 예로 요즘 CSI같은 시리즈물도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마당에 범죄 현장에서 장갑도 끼지 않고 이것 저것 만지며 둘러보는 형사들의 모습이라니...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걸까?

아무튼 이 영화를 보고 예전에 '여고괴담'을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이 떠올랐다. 당시만 해도 국내 영화 시장에 공포영화의 비중이 높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고괴담'은 한국적인 한의 정서를 공포영화에 적용하며 헐리우드나 일본의 공포영화와는 다른 모습으로 우리 관객들에게 어필하여 이젠 여름에는 거의 어김없이 3~4편의 한국 공포영화들이 선보이고 있다. '오로라 공주' 또한 한국 범죄 스릴러의 또 다른 방향을 제시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무섭지는 않고 슬프기만 한 영화가 양산되고 있는 한국 공포영화계의 요즘의 모습과는 달리, '오로라 공주'의 아류작들이 아닌 다양한 형식의 범죄 스릴러를 많이 만날 수 있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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