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나면 너무나도 뻔한 얘기지만 마음이 따뜻해지는 감동적인 영화들이 있다. 이런 영화들은 대부분 실화를 바탕으로 하거나 인간 승리 또는 성취감을 그린 것들이 많다. 여기에 이런 또 하나의 영화가 관객들에게 웃음과 눈물, 감동을 준다.

언급했던 것처럼 이 영화는 너무나도 뻔한 스토리 구조를 가지고 있다. 잘나가는 피아니스트인 동창을 둔 동네 피아노 교실 선생님, 천재적인 피아노 실력을 가지고 있는 아이, 거기에 피아노 선생님에게 필이 꽂힌 아래층 피자가게 총각. 뭐 이렇게 등장인물만 봐도 스토리가 그려진다.

이렇게 예상 가능한 스토리이긴 하지만 충분한 재미와 감동을 주는 것은 아마도 과하지 않은 감정의 절제에 있는 듯 하다. 감독의 연출은 관객들에게 억지 감정을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으며 엄정화의 연기는 그에 어울리게 오버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관객들은 주인공인 지수에게 자연스럽게 감정이입된다. 이런 단조로운 스토리에 양념같은 광호(박용우 분)의 캐릭터는 극의 재미를 한층 살려주고 있다. '달콤, 살벌한 연인'에 이어 제격인 캐릭터를 만난듯 한 박용우의 연기는 앞으로 그의 행보를 더욱 기대하게 만든다. 음악영화답게 이병우 음악감독의 음악도 좋았다.

'샤인', '빌리 엘리어트' 등 비슷한 소재나 내용의 많은 영화들이 연상되긴 하지만 그래도 국내영화중에서 음악적인 소재로 이렇게 잘 만든 영화를 찾기는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맨 처음 이 영화의 제목을 접했을 때는 그 흔하디 흔한 공주병 걸린 여자의 로맨틱 코미디이겠거니 했었다. ^^? 하지만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고 전혀 분위기가 다른 범죄 스릴러 영화의 시놉시스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나라에서 범죄 스릴러 영화라... 거기다 엄정화가 주연이라구?

엄.정.화.
사실 배우로서 그녀만큼 과소평가 받았던 인물도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개인적으론 좋아하는 가수이자 배우이다. ^^;;) 요즘에야 가수와 연기자 활동을 병행하는 연예인들이 많아졌지만 엄정화가 '눈동자'라는 곡을 부르며 TV드라마에서도 얼굴을 디민 1993년 당시만 해도 가수 겸 연기자 연예인은 그리 흔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후 엄정화의 연예 활동은 연기자보다는 가수쪽에 치우지는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사실 그녀의 실질적인 데뷰는 1992년 영화 '바람부는 날에는 압구정에 가야 한다'이다. 물론 그 전에 MBC합창단 활동을 하긴 했지만) 그래서 많은 대중들은 그녀를 배우보다는 가수로서 더욱 기억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최근 몇년간 그녀의 활동은 가수보다는 배우로서 치중하고 있는 듯 하며 이제 대중들도 가수 엄정화보다는 배우 엄정화를 더 선호하는 듯 하다. 그녀를 배우로서 강하게 각인 시킨 작품은 아마도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와 TV 드라마 '아내'였을 것이다. 이 두작품을 통해서 엄정화는 기존의 섹시 가수 이미지를 벗고 당당한 커리어 우먼과 눈물 마를 날이 없는 비련의 여주인공을 넘나들며 배우로서의 영역을 넓혀 갔다. 이런 그녀의 프로필에 '오로라 공주'는 어쩌면 커다란 전환점이 될 수 있을만한 작품이 될 것 같다.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엄정화라는 배우가 중심이 된 영화이다. 사실 영화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과연 그녀가 원톱으로서 한 영화를 이끌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녀는 보기좋게 이런 걱정을 잊게 해 주고 있다.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정순정이라는 캐릭터를 통하여 때로는 신비스럽게 때로는 섬뜩하게 때로는 애처롭게 그녀는 관객들의 감정을 이끌어가고 있다. 방은진 감독의 연출 또한 그녀의 다중인격적인 캐릭터를 기괴하고 복잡하지 보여주기보다는 단순하고 절제된 모습으로 표현해 주고 있다. 그래서 관객들은 영화를 보며 왜 그녀가 그렇게 잔인하게 여러명을 죽일 수 밖에 없었는지 공감하게 만들면서 그녀를 연쇄살인범으로 보기 보다는 억울하게 죽어간 아이의 엄마로 각인시킨다. 이런 요소는 아마도 이 영화의 가장 큰 요소가 아닐까 생각된다. 스릴러라는 장르를 택했지만 결국은 드라마적인 성격이 부각되어 헐리우드 범죄 스릴러에 비해 국내의 감성에 좀 더 접근할 수 있을 듯 하다. 관객들은 첫장면에서는 잔인한 살인장면에 깜짝 놀라기도 하지만 결말에 가서는 자신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고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방은진 감독은 배우로서의 경력을 뒤로 하고 처음으로 장편 영화를 연출했다. 잘 짜여진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게 스토리를 진행지키며 관객들을 지루하지 않게 감정 조절을 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일반적인 범죄 스릴러 영화와는 달리 이 영화는 처음부터 범인이 누구인지 관객들에게 알리고 시작한다. 그래서 관객들이 과연 범인이 누군지를 궁금해하고 추리해 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살인의 이유를 의문시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서 감독은 정순정을 통하여 현실에 대한 차가운 시선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 베이시스 출신의 정재형의 영화 음악도 이런 감독의 의도에 맞게 영상을 잘 받쳐주고 있다.

한가지 아쉬웠던 점은 형사들의 수사에 관한 연출의 디테일이었다. 단적인 예로 요즘 CSI같은 시리즈물도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마당에 범죄 현장에서 장갑도 끼지 않고 이것 저것 만지며 둘러보는 형사들의 모습이라니...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걸까?

아무튼 이 영화를 보고 예전에 '여고괴담'을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이 떠올랐다. 당시만 해도 국내 영화 시장에 공포영화의 비중이 높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고괴담'은 한국적인 한의 정서를 공포영화에 적용하며 헐리우드나 일본의 공포영화와는 다른 모습으로 우리 관객들에게 어필하여 이젠 여름에는 거의 어김없이 3~4편의 한국 공포영화들이 선보이고 있다. '오로라 공주' 또한 한국 범죄 스릴러의 또 다른 방향을 제시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무섭지는 않고 슬프기만 한 영화가 양산되고 있는 한국 공포영화계의 요즘의 모습과는 달리, '오로라 공주'의 아류작들이 아닌 다양한 형식의 범죄 스릴러를 많이 만날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이 세상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그 많은 사람들은 또한 다들 각자의 삶의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으며 또 그 속에 가지각색의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인간과 관계된 영원한 테마일 수 밖에 없는 사랑. 그 여러가지 사랑들 중 여섯커플의 일주일간의 모습을 엿보자. (사실 영화 광고시에는 4~5커플이 주가 되어 홍보가 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여섯 커플(?)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1. 나두철(황정민)과 허유정(엄정화) - 소년 소녀를 만나다
'Opposite Attract', '반대가 끌리는 이유'같은 팝이나 가요들도 있듯이 의외로 서로 정반대되는 사람들끼리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꽤 많은 것 같다. 두철과 유정은 그 전형적인 케이스로 초반의 티격태격 대립하던 관계가 점점 사랑의 감정으로 발전하게 된다. 코믹적인 요소가 가장 많아서 영화의 전반적인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특히 영화 전편에서도 매우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황정민의 캐릭터가 참 흥미롭다. 유정에게서 전남편이 게이라는 소리를 듣고 정말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반문하는 그의 모습은 '로드 무비'에서 정찬과 격렬한 정사장면을 연출했던 그가 생각나 어이없는 웃음이 나 버렸고, 유정과 데이트하며 본 영화는 바로 황정민 자신이 출연한 '달콤한 인생'이었고 더구나 그가 출연한 장면이 보여진다. 그만큼 이 영화에서 그의 비중과 매력은 매우 컸으며 이미 제작 당시부터 어쩌면 이런 반응을 의도적으로 만들려고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유정역의 엄정화도 이제는 가수보다는 배우로서의 모습이 훨씬 어울려보인다.

2. 김창후(임창정)와 유선애(서영희) - 낭만파 부부
과연 이 세상은 사랑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현실과 이상사이의 괴리감을 이 커플을 보면서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더구나 경기가 좋지 않은 요즘이라 그런지 더더욱 그들의 처지가 공감이 갔던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이 애처럽게 보이면서도 너무나 흐뭇한 것은 역시 사람들은 영화를 보면서 현실은 조금은 제쳐두고 꿈을 꾸고 싶어해서인가보다. 게다가 이 커플의 애정표현은 정말 닭살이다. 어쨌든 로맨틱 코미디 답게 밝은 미래를 예상하게 만드는 결말이 위안이 된다.


3. 박성원(김수로)과 진아 - 천사의 도전
흔한 모성애 대신 이 영화에는 부성애 이야기가 등장한다. 사랑때문에 최고의 농구선수에서 퇴출당해버린 후 신용불량자들에게 전화로 돈 갚을 것을 닥달하며 하루 하루를 보내던 성원에게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그의 딸은 그동안 잊고 있었던 사랑의 감정을 다시 밝힌다. 그리고 그 딸을 위해서 마지막 슛을 날린다. 참, 하지원의 출연은 카메오 치고는 꽤 비중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김수로와 하지원의 커플로의 모습은 글쎄... ^^;;



4. 유정훈(정경호)과 임수경(윤진서) - 소녀의 기도
글쎄... 개인적으로는 가장 엉뚱했던 에피소드였다. 결국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세속의 사랑을 포기하고 종교적인 사랑을 선택한다는... 내가 그리 종교적인 사람이 아니어서인지 동감할 수는 없지만 그럴 수도 있겠지 하는 생각은 든다. 그나저나 뒤늦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 정훈만 불쌍하다. 그러고 보니 이 영화에서 결국 홀로 남게 되는건 정훈뿐이네... -_-;;




5. 곽회장(주현)과 오여인(오미희) - 곽씨네하우스
로맨스 그레이. 사랑은 젊은 사람들만의 감정이 아니다. 50이 되었든 60이 되었든 사랑의 감정은 모두 마찬가지이지만 우리들은 그런 사실을 가끔은 간과하는 것 같다. 곽회장은 나이답게 감정 표현에 익숙하지도 않고 게다가 고집불통이기까지 하지만 결국은 그의 마지막 사랑이 될 수 있을 한 여인에게 더 늦기전에 그의 평생 우상이었던 오드리 햅번보다도 더 아름답게 만년 배우지망생인 그녀의 모습을 필름에 담아 그의 영화관에서 그녀를 관객으로 두고 평생 단 한번의 상영을 한다. 그래, 사랑하기에 늦은 때는 없다. 사랑의 고백을 주저하지 말자.

6. 조사장(천호진)과 그의 친구 그리고 남자 가정부(김태현) - 아메리칸 불독
최근들어 국내 영화에도 동성애에 대한 소재가 간혹 보이기는 했지만 이런 상업성이 짙은 옴니버스 영화에 한 에피소드로서 소개된 것은 어찌보면 매우 파격적이다. 물론 이 에피소드가 이 영화를 소개하는 주요 에피소드 4~5개에 포함이 되어 있지는 않지만 말이다. 하지만 민규동 감독의 전작이었던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를 생각해 본다면 어느정도 수긍이 가는 소재 선택이란 생각도 든다. 현실에서는 거의 인정받을 수 없는 동성애. 그래서 사랑했던 친구와의 관계도 지속되지 못했고 현실에 타협하며 각자 가정을 이루고 살아갔지만 결국 조사장은 이혼을 하게 되고 그의 친구는 사업에 실패한 후 조사장에게까지 버림받고 결국은 자살을 택한다. 그나름대로 방식으로 조사장을 사랑했던 친구의 편지를 품에 안고 오열하던 조사장의 모습을 떠올리면 아직도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아내도, 아들도, 친구도 떠나고 홀로남은 조사장에게 과연 사랑은 존재할까? 아니 이제 다시 따뜻한 피가 돌기 시작한 조사장의 마음을 누가 더 뜨겁게 지펴줄까? 감독은 이 에피소드의 결말에서 조금은 대중을 의식한 듯 하다. 아직은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아서인지 상당히 절제되어 있는 마무리를 보여주어서 좀 아쉬운 느낌도 있다. 게다가 각종 홍보매체에도 이 에피소드에 대한 언급은 별로 없다. 아무튼 개인적으론 이 영화에서 가장 슬픈 에피소드였다.

이 영화가 기획될 때부터 많은 화제가 되었었던 것이 사실이다. 민규동 감독의 6년만의 영화라는 것도 그랬지만 한국판 '러브 액츄얼리'라는 타이틀이 입에 오르 내리면서 과연 어떤 영화가 탄생할지 궁금증을 끌어 모았다. 이제 영화는 공개되었고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굳지 외국 영화제목을 들먹이지 않아도 될 만큼 아니 그보다 더 진지하고 사랑스러우며 현실적이다.

9개월동안 시나리오 작업을 했다는 감독의 노력 덕분에 자칫 산만해지기 쉬운 옴니버스 영화의 단점을 잘 극복하며 각 에피소드들간의 연결도 매우 자연스러웠다. 배우들 또한 영화의 분위기에 맞는 캐릭터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가 말하고 싶은 모든 것은 아마도 두철이 선애에게 했던 말로 모두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 당신으로 인해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명이라도 있다면 당신은 살 가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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